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楼兰古城:沙漠深处的神秘王国

2017-01-19凡一CFP

金桥 2017年1期
关键词:罗布泊楼兰古城

판이(凡一) CFP

楼兰古城:沙漠深处的神秘王国

러우란고성(樓蘭古城):사막 깊은 곳 신비의 왕국

판이(凡一) CFP

신쟝(新疆) 뤄부포(羅布泊)호수 서쪽의 사막 가운데에 러우란고성의 유적이 흩어져 있다. 주변에는 이미 무너져 내린 담장만이 외롭게 버티고 서있어처량하고 비장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在新疆罗布泊西部沙漠中散落着的楼兰古城遗迹,四周多处已经坍塌,只剩下断断续续的墙垣孤伶伶地站立着,显得格外苍凉、悲壮。

상하이 동방예술센터에서 상영된 무대극-<러우란 미녀>.在上海东方艺术中心亮相的舞台剧《楼兰女》。

중국 신쟝(新疆) 뤄부포(羅布泊) 서쪽의 광활한 사막 가운데에는 오래된 옛 도시의유적이 흩어져 있다. 오래된옛 도시의 주변에는 이미 무너져 내린 담장만이 외롭게버티고 서있을 뿐이다. 유적전체는 매우 오래되고 장중하며 성 안에 남아있는 건축물은 파괴되어 생기를 잃은 채처량하고 비장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신장의 주요 유적지 러우란고성이다. 이곳은 한때 서역의 허브에 위치하면서 일찍이 고대실크로드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기원전176년에 건국되었던 러우란왕국은 서기 630년 돌연 미스터리하게 사라지고 말았다.다만 사막 한가운데에 남은폐허만이 후세 사람들의 추측을 자아내게 할 뿐이다.

러우란 미녀의 고향

신쟝 위구르자치구 박물관은 러우란고성 북쪽 티에반허(鐵板河) 강 삼각주의 한 묘지에 묻혀 있었던 여인의 시신을 소장하고 있다. 이 여인은 생전에 퀭한 눈과 오똑한코, 엷은 턱선의 외모를 지닌미인으로 추정되며 지금으로부터 무려 3,800여 년 전에생존했던 인물로 바로 그녀가그 유명한‘러우란 미녀’이다.

전설에 따르면 러우란은미녀의 고장으로 유명했다고한다. 그래서 당시 서역 각국의 귀족들이 앞다투어 러우란의 미녀들을 아내로 삼았다고 한다. 서기 326년 둔황(敦煌) 지역에 할거하던 장준(張駿)은 천하의 혼란을 틈타 군사를 이끌고 러우란을 공격했다. 당시에 러우란왕국의 국명은 선선국(鄯善國)이었다.국왕은 어쩔 수 없이 러우란의 미녀를 바치기로 하고 혼란을 간신히 수습했다.

수많은 미녀들을 배출했던러우란왕국은 한(漢)나라 시기 서역의 36개 왕국의 하나였으며 동서 무역으로 번성했다.

중국 고대의 유명한 역사학자 사마천(司馬遷)은 그의 저서 〈사기(史記)〉에서“러우란은 여인들이 아름답고 도시는 성곽에 둘러싸여있으며 소금호수에 인접해 있다”라고 기재했다. 여기서말하는 소금호수란 바로 뤄부포 호수를 말한다. 당시의 뤄부포 호수 일대는 오아시스지역으로 러우란왕국은 바로이 오아시스를 끼고 건립되었다. 동한 시기에 러우란왕국은 1,570가구에 인구는 1만4,100명에 이르렀다. 도시의거리는 가로세로로 얽혀 있었고 점포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있었으며 매년 수많은 상인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그들 가운데에는 쿠샨왕조, 아르사크왕조, 대원국(大宛國) 등의 국가에서 파견한 사신들도 있었으며 무리를 지어 이동하던대상들과 서역에 불경을 구하러 가던 승려들도 있었다.

당시 러우란의 거리는 매우 번성했는데 동쪽에서 온상인들은 윤기가 흐르고 아름다운 비단을 가져 왔고 서쪽에서 온 상인들은 화려한 색채의 모직물, 휘황찬란한 대원국의 유리공예품과 코끝을자극하는 페르시아의 각종 향신료 등 다양하고 진귀한 물건들을 가져 왔다. 그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흥정을 하고거래를 하였으니 물건을 사는이들은 실컷 눈요기를 즐길수 있었다.

한나라 소제(昭帝) 시기에러우란왕국은 국명을 선선국으로 바꾼다. 당시 이곳의 국왕은 한나라 조정에 군대의주둔을 요청하였으며 지금의신쟝 뤄챵(若羌)현 미란(米蘭)진에 한나라 군대가 머물게 되었다. 이 때부터 러우란은 한나라 중앙정부의 통제를받는 서역의 전략적 요충지가되었다.

번영하던 도시의 멸망수수께끼

그렇다면 그토록 번성했던러우란고성이 도대체 어찌하여 돌연 사라지고 결과적으로죽음의 땅이 되어 버리고만것일까?

서기 400년 동진(東晉) 시기에 고승 법현(法顯)은 서역에 불경을 구하러 가던 중에러우란을 경유하게 되었다.그는 이곳에서 목격했던 것에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들이 없고 땅에는 뛰어다니는 짐승들이 없으니 사방을 둘러봐도 죽은 이들의 뼈다귀만이 이정표일 뿐이다.”그가 다녀가고 난 후 1000여년간의 모래폭풍에 시달린 러우란은 결국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이탐험팀을 이끌고 신장 뤄부포탐험에 나선 뒤에야 비로소사라졌던 러우란고성이 사막속에서 다시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각국의 탐험대들이 행동에 나섰고 그들은 러우란고성 유적지에서 중요한 유물들을 찾아내고 끝내는 약탈해 갔다.

오늘날 러우란고성 유적지에는 뤄부포 호수 서안의 야단(雅丹)지형들 속에 폐허 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전체 성곽의 유적은 12만㎡에 정방형에 가까운 구조를 하고 있다. 성 내부의 건축물은 전부목조가옥으로 백양나무로 기둥을 했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이 살던 곳의 담장은 갈대나버드나무를 엮고 여기에 다시점토를 발라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성 가운데 퇴적물 더미에서 고고학자들은 한문으로 기록된 목간들을 발견했다. 그중에는 묵서서진(墨書西晋)태시(泰始) 4년, 즉 서기 295년의 목간도 있었는데 이것은러우란고성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시대적 근거를 알려준다.

이 밖에 러우란고성에서는목조 및 석조의 여인상이 출토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나라 시대의 칠기와 아름다운실크 등도 발견되었다. 예를들어 장수명광(長壽明光) 비단으로 파란색 바탕에 황색,갈색, 녹색의 3색으로 가로세로의 구름문양을 내었으며 가운데에는 호랑이, 용, 벽사(避邪) 등의 신령스러운 동물들이 들어가 있고 간격을 두고‘장수명광’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번성할때의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러우란왕국의 모습을 상상할 수있다. 한편으로는 그토록 아름답던 실크로드의 고대왕국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어느날 갑자기 소리도 없이 사라졌는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마침내 밝혀진 진실

러우란 미녀가 발굴되면서수수께끼가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러우란 미녀 시신의 해부를 통해 전문가들은 그녀의폐 속에 모래 먼지가 들어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추정해 볼 때 3,800여 년 전러우란 미녀가 생활하던 환경이 이미 건조하고 모래가많은 사막에 가까웠음을 알수 있었다. 러우란 미녀 출토당시 외부적으로 나타난 특징도 전문가들이 기후에 대하여 추정을 하는데 의견을일치하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방풍망토와 연결된 모자가 씌여져 있었으며 아래턱 앞으로 띠가 둘러져 있었다. 이를 통해 볼 때당시의 러우란 지역은 날씨가 무덥고 모래 바람이 많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뤄부포 호수는 중국 서북 건조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호수로 면적이 무려 12,000㎢에달하며 20세기 초에도 여전히 면적이 500㎢나 되었다.당시 호숫가에 세워진 러우란왕국은 수백 년간 번성했다. 그렇다면 그토록 수풀이아름답게 우거졌던 오아시스지역이 어떻게 해서 황량한사막으로 변해버린 것일까?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동한 이후 타리무허(塔里木河) 강 중류의 물길이 바뀌면서 러우란은 물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러우란왕국은 사방에도움을 청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물을 끌어들여 일시적으로 물 부족 사태를 해결할 수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는 일시적인 미봉책이었을뿐, 결과적으로 물이 끊기면서 왕국은 버려지고 만다.

사서를 보면 러우란왕국의쇠퇴는 전체 사회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러우란왕국의 말기에 해당하는 5호16국 시기는 중국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기였다. 북방의 수많은 유목민족들이 자립하여 할거하며 전란이 끊이질 않았다. 거기다가러우란왕국이 위치한 곳도 군사적 요충지로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이었다. 끊임없는전란과 반복되는 약탈로 러우란왕국은 괴멸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고 그토록 번성했던이 실크로드의 고대도시는 인적이 드문 죽음의 땅으로 바뀌고 말았던 것이다.

참관자는 신쟝(新疆) 러오란(楼兰)에서 출토된 동한시기의 저고리를 참관하고 있었다.观众正在参观一件新疆楼兰出土的东汉长袖短衣。

楼兰古城:沙漠深处的神秘王国

在新疆罗布泊西部的广袤沙漠之中,散落着一片古城遗址。古城四周多处已经坍塌,只剩下断断续续的墙垣孤伶伶地站立着。整座遗址旷古凝重,城内破败的建筑了无生机,显得格外苍凉、悲壮。

这里便是举世闻名的新疆重要古迹——楼兰古城。它处于西域的枢纽,在古代丝绸之路上占有极为重要的地位。然而,在公元前176年建国的楼兰古国,到公元630年突然神秘地消失了,只留下了一片废墟静立在沙漠中,引发后人无数遐想。

楼兰美女的故乡

在新疆维吾尔自治区博物馆里,珍藏着一具出土于楼兰古城北部铁板河三角洲的一片墓地的女尸。这位美女,深眼窝,高鼻梁,下巴尖翘,非常美丽,至今已有3800多年的历史,她就是丝绸之路上久负盛名的“楼兰美女”。

相传,楼兰美女名闻天下。当时西域各国的王公贵族们纷纷想娶楼兰美女为妻。公元326年,割据敦煌的张骏趁天下大乱,派兵攻打楼兰,当时的楼兰国已改名为鄯善国。国王被逼无奈,不得不献出楼兰美女,这才平息了一场战争。

孕育了无数美女的楼兰国是汉代时西域三十六国之一,中西方贸易的繁华重镇。

中国古代著名史学家司马迁在《史记》中记载,“楼兰,姑师,邑有城郭,临盐泽。”盐泽说的就是罗布泊。当年的罗布泊还是一片绿洲,楼兰城就建在这片绿洲之上。到东汉时,楼兰国已有人家1570户,人口14100人。城中街巷纵横,商铺林立,每年有成千上万的商人来到这里。他们中有贵霜、安息、大宛等国派来的使臣,也有成群结队的行商和西行取经的僧侣。

当时的楼兰城里热闹非凡,由东而来的商人带来光滑美丽的中国丝绸;从西方来的商人,则带来色彩鲜艳的毛织品、五彩缤纷的大宛琉璃和各种奇香扑鼻的安息香料等,各种奇珍异宝在这里汇集、交换,让购买者眼花缭乱。

汉昭帝时,楼兰改国名为鄯善,国王请求汉朝政府驻军伊循,也就是今天的新疆若羌县米兰镇,楼兰从此成为汉朝中央政权控制西域的战略重镇。

繁华重镇的死亡之谜

令人迷惑不解的是,曾经繁荣一时的楼兰古城,在辉煌了几个世纪之后,竟然神秘地消失,最终被人们视为“死亡之地”。

公元400年,东晋时期的高僧法显西行取经,途经楼兰城,看到这里已是“上无飞鸟,下无走兽,遍及望目,唯以死人枯骨为标识耳。”自法显经过,又历经一千多年的风沙洗劫后,楼兰城最终从人们的视野中彻底消失了。

直到20世纪初,瑞典探险家斯文·赫定带领一支探险队来到新疆罗布泊地区探险,他们在沙漠中意外发现了消失已久的楼兰古城。消息一经传出,各国考察团闻风而动,他们在楼兰古城遗址上搜寻,并掠走了大批重要文物。

如今的楼兰古城遗址,散布在罗布泊西岸的雅丹地貌群中,目之所及只剩下一片废墟遗迹。整个楼兰古城占地12万平方米,接近正方形。城中全是木造房屋,胡杨木的柱子,大部分居民区的院墙,均用芦苇扎成束,或把柳条编织起来,再抹上黏土筑造而成。

在城中的堆积物中,考古专家发现了一批汉文木简,其中墨书西晋、泰始四年,也就是公元295年的木简,为研究楼兰城的历史提供了准确纪年。

此外,楼兰古城还出土了一些木雕和石雕的女人像、汉代漆器、以及美丽的丝织物。如长寿明光锦,在蓝色地上,以黄、褐、绿三色经线织出的云雷纹,中间填充虎、龙、辟邪等瑞兽,间隔织出小篆“长寿明光”吉祥语。可以想象出当年楼兰城的繁华和美丽,同时,也让人感到困惑:繁盛一时的丝路古国,为何突然销声匿迹?

真相大白

楼兰美女的出现,使谜团一层层解开。

通过对楼兰美女的解剖,专家发现她的肺中存有沙尘,由此推断,3800多年前,楼兰美女生活的环境就已经是干旱多沙了。楼兰美女出土时的外部特征,也与专家对气候的推断不谋而合。楼兰美女头戴麻布防风斗篷连衣帽,下颌前有线带横穿,从这些迹象可以推测,当年楼兰地区天气炎热,风沙较大。

罗布泊曾经是中国西北干旱地区最大的湖泊,湖水面积达12000平方公里,20世纪初仍然达到500平方公里,当年楼兰人在罗布泊湖畔建造的楼兰城,一直繁衍生活了数百年。那水草丰美的绿洲,何以变成茫茫沙漠?

史书记载,东汉以后,由于塔里木河中游的注滨河改道,导致楼兰严重缺水。缺水最危急的时候,楼兰人不得不四处请外援,几经周折把水引入楼兰城,暂时缓解了楼兰城缺水的困境。然而,即便如此,也只能暂时缓解水荒,楼兰城最终还是因为断水而废弃了。

翻阅史籍,还会发现楼兰国的衰亡与整个社会的发展息息相关。楼兰国最后的存在时间是东晋十六国时期,这正是中国历史上政局最为混乱的时期,北方许多民族自立为藩,战乱频繁。而楼兰国所处的位置,正是军事要冲和兵家必争之地。频繁的战争,掠夺性的洗劫,使楼兰遭到了毁灭性的破坏,使得这座丝绸之路上的繁华重镇最终变成了人迹罕至的“死亡之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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